티스토리 뷰


출처
https://m.blog.naver.com/yang0ho/222147977034

구마라습의 처음 이름은 구마라기바(鳩滅耆婆)였다

구마라습의 본명은 쿠마라지바(Kumārajīva)이며, 구마라십, 구마라집으로 표기하기도 하고, 한자로 이름...

blog.naver.com


블로그 ㅡ 시절인연
마음공부
구마라습의 처음 이름은 구마라기바(鳩滅耆婆)였다

프로필 ㅡ 나무아미타불아멘
2020. 11. 18. 20:32

(내용)

구마라습의 본명은 쿠마라지바(Kumārajīva)이며, 구마라십, 구마라집으로 표기하기도 하고, 한자로 이름을 적을 때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라고 적기도 하며,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이라고도 한다.

    구마라습의 처음 이름은 구마라기바(鳩滅耆婆)였다. 이것은 부모의 이름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구마라습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이었고, 어머니는 기바(耆婆)였기 때문에 둘을 취해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중국명은 동수(童壽)라 했는데, ‘동수(童壽)’의 뜻은 어리지만 노성(老成)한 어른처럼 많이 알고 언행이나 생각이 깊고 점잖다는 말이다.

    구마라습의 집안은 인도 카슈미르 지방에서 대대로 나라의 재상을 지낼 만큼 명문가였다. 구마라습의 조부 구마달다(鳩摩達多)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다.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나 명성이 나라 안에 높았다. 아버지는 대학승으로 이름이 쿠마라야나(Kumārāyana, 구마라염/鳩摩羅炎)이며,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지조가 있었다. 당시 계빈국 왕 불사밀다라(弗舍蜜多羅)가 불법을 무시하고 심지어 탄압까지 하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곧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즈음임에도 이를 사양하고 출가해 파미르를 넘어 당시에 서역 지방에서 불교국으로 널리 알려진 구자국으로 왔다.

    구자국(龜玆國) 왕 백순(白純)은 그가 영화로움을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해 몸소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고, 그를 청해 국사(國師)로 삼았다.

    구자국(龜玆國)은 지금의 쿠차(庫車, Kucha)로서 중국 서북부 신장ㆍ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쿠차현 지역인데,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 무자트강(목찰제하)의 남쪽에 위치한다.

    당시 구자국 왕에게는 기바(耆婆, Jiva)라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스무 살, 사려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거쳐 간 것은 능숙하게 하고, 한 번 들은 것은 듣자마자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관상법에 의하면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했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했으나 그녀는 어느 곳이든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라염(鳩摩羅炎)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했다. 구자국 왕은 구마염을 핍박해 그녀를 아내로 삼게 했다. 얼마 후 구마라습을 잉태했다.

    구마라습이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 기바는 신통한 깨달음과 빼어난 이해력이 평소의 배나 더해지는 것을 자각했다. 구자국의 작리대사(雀梨大寺)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은데다, 도를 깨달은 승려가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 왕실(王室)의 귀부인들과 덕행이 있는 여러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공양을 베풀고 청해 법문을 들었다.

    기바는 갑자기 저절로 천축어(天竺語)에 능통하게 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반드시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내니, 대중들이 모두 감탄했다. 그곳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어 말했다.

    “이것은 필시 슬기로운 자식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마라습이 출생한 뒤에 그녀는 곧 예전의 천축어를 도로 잊어버렸다고 한다. 얼마 후 기바는 출가(出家)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불사제바(弗沙提婆)라고 불렀다. 이 불사제바가 병으로 죽자 기바는 성(城)을 나가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며 사색했다. 무덤 사이에 마른 해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굴러다니는 것을 봤다. 이에 괴로움의 근본을 깊이 사유(思惟)해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머리를 깎지 못한다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엿샛날 밤에 이르자 기력(氣力)이 실낱같이 쇠약해졌다. 자칫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도 이르지 못할 듯했다. 이에 남편이 두려워 출가를 허락했다. 그녀는 아직 삭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즉시 사람을 시켜 삭발을 해 주니 그제야 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계(戒)를 받았다. 선법(禪法)을 좋아해 애오라지 정진하고 나태하지 않아, 초과(初果)를 배워 터득했다.

    구마라습도 나이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스승에게 불경을 배웠다. 하루에 천 개의 게송(偈頌)을 암송했다고 한다. 한 개의 게송이 대개 32자(字)이니, 모두 3만 2천 글자인 셈이다. 물론 과장된 말이기는 하나 그만큼 총명했다는 말이겠다. 게송뿐만 아니라 비담(毘曇-論藏)을 암송한 뒤에, 스승이 그 뜻을 전수하니, 즉시 통달해 그윽한 이치를 펴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 사람들은 구마라습의 어머니 기바를 왕의 누이로서 대우했다. 이 때문에 재물로서 공양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이를 피해 구마라습을 이끌고 떠나기로 했다. 구마라습은 나이 아홉 살 때(352년)에 어머니를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파미르고원의 설산(雪山)을 넘고, 신두하(辛頭河-인더스강)를 건너, 아버지의 고향인 계빈국(罽賓國-카슈미르)에 이르렀다. 당시 계빈국은 불교의 최고 학맥을 구가하던 고장이었다.

    거기서 이름난 덕을 지닌 법사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나니, 바로 계빈국 왕의 사촌 아우였다. 깊고 순수해 큰 기량이 있었다. 재주가 있고 총명한데다 아는 것이 넓어 당시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삼장(三藏)과 구부경(九部經-九分敎를 말함)을 해박하게 익히지 않음이 없었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손수 천 개의 게송을 쓰고, 낮부터 밤까지는 천 개의 게송을 외웠다. 이름이 여러 나라에 퍼져서 멀거나 가깝거나 그를 스승으로 섬기러 왔다.

    구마라습은 곧 그를 스승으로 삼아 존숭했다. 그에게서 <중아함경(中阿含經)>, <장아함경(長阿含經)> 등 초기경전과 설일체유부에 전승돼온 아비달마 논서 등 소승 4백만 글자를 배웠다.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매양 구마라습의 신통함과 빼어남을 칭찬하며, ‘사리불의 현신’이라 했다.

    마침내 반두달다의 추천으로 구마라습의 총명에 대한 명성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즉시 구마라습을 궁중으로 초청해, 외도(外道)의 논사들을 모아 놓고 국왕의 면전에서 서로 공격해 힐난(詰難-토론)하게 했다.

    논쟁이 처음 벌어질 때에, 외도들은 구마라습의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아 말투가 자못 불손했다. 그 어린 나이에 구마라습은 틈을 타 외도들의 기세를 꺾었다. 외도들이 기가 죽어 부끄러워 말을 못했다. 이와 같아 구마라습이 대단한 지혜와 변론술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해, 날마다 말린 거위고기 한 쌍(雙), 멥쌀과 밀가루 각각 세 말[斗] 등을 주었다. 이것은 당시 상등 공양에 해당했다.

    구마라습이 머물던 사찰의 주지도 이에 비구 다섯 명과 사미(沙彌) 열 명을 보내 구마라습의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구마라습의 제자같이 하게 했다. 그를 존경해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계빈국에 머문 지 3년, 구마라습의 나이 열두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다시 구자국(龜玆國)으로 귀국길에 올랐다(355년). 당시 그의 어머니는 카슈미르에서 구자국으로 향하는 귀로를 애초에 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식을 택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파미르고원을 피해 카슈미르의 왼편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 대월지국에 들렀다가 다시 사륵국(沙勒/疏勒, 카슈가르)을 거쳐 실크로드 북도를 타고 구자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귀국길에 지나오는 여러 나라들에서 높은 벼슬로 구마라습을 초빙하려 했으나 구마라습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기바는 그를 데리고 월지국(月氏國)의 북쪽 산(山)에 이르렀다. 그 산에는 한 나한(羅漢)이 있었다. 그 나한은 구마라습을 보자, 남달리 여겨 그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항상 이 사미(沙彌)를 지켜 보호해야만 한다.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굴다(優婆掘多-아소카왕을 교화한 인도 제4대 조사)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율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큰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필히 재주가 밝고 슬기가 찌르는 법사(法師)가 될 것이다.”

    구마라습 모자는 귀국 도중 사륵국(沙勒國-카슈가르/Kashgar)에 이르렀다. 사륵국은 현재 중국 신장ㆍ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카스(喀什, Kashgar)이니 구자국의 이웃나라였다. 구마라습은 사륵국에서 하루는 절에 모셔놓은 커다란 부처님 발우를 머리에 이었는데[頂戴]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마음속으로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무거워졌다.  도저히 머리에 이고 있을 수 없게 되자 급기야는 비명까지 지르며 내려놓았다.

    이에 어머니가 물었다. “왜 난리냐?”

    구마라습이 대답하기를, “어린 제 마음에 분별(分別)함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깃들었을 따름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때 구마라습의 나이 12∼13살 때이니 어린 나이에 벌써 ‘일체유심조’의 도리에 가깝게 다가간 것 같다.

    마침내 사륵국에 일 년 간 머물게 됐다. 그 해 겨울 아비담(阿毘曇)을 암송했다. 또한 <십문품(十門品)>과 <수지품(修智品)> 등 여러 품(品)에 대해 묻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두루 그 절묘함을 통달했다. 또 <육족론(六足論)>에 관한 모든 물음에 대해서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당시 사륵국에 희견(喜見)이라는 삼장(三藏) 사문이 있었다. 그는 왕에게 말했다.

    “이 사미(沙彌)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왕께서는 이 사미를 청해 최초로 설법의 문을 열도록 하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온 나라 안의 사문들이 구마라습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둘째, 구자국(龜玆國) 왕은 필시 '구마라습이 우리나라 출신(出身)인데, 저들이 구마라습을 존경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와서 우호(友好)를 교환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곧 그것을 허락했다. 즉시 큰 모임을 베풀었다. 구마라습을 청해 높은 자리에 올라 <전법륜경(轉法輪經)>을 강설하도록 했다. 과연 구자국 왕은 지위가 높은 사신을 파견해 두터운 우호에 보답했다.

    구마라습은 설법하는 여가에 외도의 경전들도 탐색했다. 예컨대 브라만교의 <베단타(Vedanta)>을 잘 익혀서, 글을 짓고 묻고 답하는 따위의 일에 매우 밝았다. 또 4베다(4Veda)의 전적들과 5명(五明)의 여러 논(論)들도 널리 읽었다. 그 외에 천문 역학까지 모두 다 극진히 연구해 통달했다고 한다.

    그는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해 자잘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으니, 다른 수행자(修行者)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구마라습은 자연스런 마음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사륵국에는 사륵국의 남쪽에 있는 사차국(莎車國, 야르칸트,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의 왕자 형제 두 명이 출가해 와있었다. 형은 수리야발타(須利耶跋陀)라 하고, 아우는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라고 했다.

    아우 수리야소마는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오로지 대승(大乘)으로써 교화했다. 그의 형과 여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습도 역시 수리야소마를 존숭하고 받들었다. 가까이 하며 서로 좋아함이 더욱 지극했다. 사차국은 당시 서역지방에서 대승불교의 중심지였던 우전국(于闐國, Khotan, 和田)의 영향으로 대승불교가 유행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구마라습은 “모든 법이 다 공하며 무상하다”는 대승경전 구절을 보고는 괴이하게 생각해 “이 경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 법을 모두 파괴해버리지 않는가?“고 묻자, 수리야소마는 대답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리야소마는 구마라습을 위해 대승경전 <아뇩달경(阿耨達經)>을 설해 주었다. 그 후 다시 수리야발타ㆍ수리야소마의 형제에게 중론(中論)ㆍ백론(百論)ㆍ십이부론(十二部論) 등의 대승론을 공부했다.

    이 무렵 사륵국 태자의 스승으로 불타야사(佛陀耶舍, Buddaha-yasas)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계빈국 출신으로 대ㆍ소승의 경ㆍ율ㆍ논 삼장을 수학하고, 바라문교의 오명(五明)까지 널리 습득한 학승이었다. 사륵국에 온 구마라습을 만나 둘은 친하게 됐다. 구마라습은 불타야사에게도 대승교를 수학하며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불타야사는 사제의 격식과 나이의 장벽을 털어버리고 그를 세상에 둘도 없는 벗으로 대접했다. 밤낮없이 붙어 다니며 불법의 깊은 뜻을 논의했다.

    구마라습은 이 때문에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모두를 깊이 궁구해 밝혀, 이들 학승들과 서로 주고받는 문답이 오랜 시일 동안 계속됐다. 구마라습이 비로소 대승 이치의 돌아감을 알고는 마침내 오로지 대승경전을 힘써 공부했다. 특히 수리야소마의 감화를 많이 받아 구마라습은 소승에서 대승 중관학파(中觀學派)로 바뀐 것이다.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옛날에 소승을 배운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황금을 알지 못한 채 놋쇠를 가지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구나.”

    그리하여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을 익히고 외우는 한편 대승 경ㆍ론을 널리 구했다.

얼마 후 어머니를 따라 온숙국(溫宿國-지금의 우시/Ush, Uch, 烏什)에 이르렀다. 바로 구자국의 북쪽 경계였다. 당시 온숙국에는 한 도사(道士)가 있었다. 신묘(神妙)한 말솜씨가 빼어나서 명성을 여러 나라에 떨쳤다. 그는 제 손으로 왕의 큰 북을 치면서 스스로 맹세하며 말했다.

    “논쟁으로 나를 이기는 자가 있으면 내 목을 잘라서 사죄하겠다.”

    구마라습이 이른 뒤에 둘이 서로 다른 주장으로 논쟁을 벌여 따졌다. 도사는 헷갈리고 얼이 빠져 불교에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했다.

    구자국 왕 백순은 몸소 온숙국까지 가서 구마라습을 맞이해 구자국으로 함께 돌아왔다. 그리고 널리 여러 경들을 강설하니, 사방의 먼 지방에서 존숭하고 우러러 아무도 그를 대항할 자가 없었다.

그 당시 구자국의 한 왕녀(王女)가 비구니가 됐다. 이름이 아갈야말제(阿軻耶末帝)라고 한다. 그 비구니는 많은 경전들을 널리 봤다. 특히 선(禪)의 크나큰 요체를 깊이 알았으며, 이미 2과(果: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했다. 그 비구니는 구마라습의 법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이에 다시 큰 모임을 마련하고, 대승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열어줄 것을 청했다.

    구마라습은 이 법회에서 모든 현상이 다 공해서 내가 없음[개공무아(皆空無我)]을 미루어 변론했다. 음(陰)이나 계(界)는 임시 빌려 쓴 이름이지 실제가 아님[가명비실(假名非實)]을 분별해 설했다. 당시 모인 청중들이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깨달음이 뒤늦었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

    구라마습의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왕궁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마라차(卑魔羅叉, Vimalāksā, 337~413)에게 <십송률(十誦律)>을 배웠다. 이리하여 구마라습의 명성이 널리 퍼져 파미르 고원 동쪽에 가득했다. 그의 명예가 바깥 중국에까지 널리 퍼진 것이다.

    얼마 후 구마라습의 어머니 기바는 구자국을 하직하고 천축국(天竺國)으로 갔다. 가면서 오빠인 구자국 왕 백순(白純)에게 말했다.

    “얼마 안 돼 구자국은 쇠망(衰亡)할 것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천축국에 가서 3과(果: 아나함과)를 증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구마라습의 어머니는 이별에 임해 구마라습에게 말했다.

    “대승경전의 심오한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떨치도록 해라. 그것을 동쪽 땅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너 자신에게만은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하겠니?”

    구마라습은 대답했다.

    “부처님의 도리는 중생의 이익(利益)을 위해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불법의 큰 교화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습은 구자국에 체류해 신사(新寺)에 거주했다. 후에 절 곁의 오래된 궁중에서 최초로 <마하반야방광경(摩訶般若放光經)>을 얻었다. 즉시 책장을 펼쳐서 읽으려고 할 때에, 마라(魔羅, Mara. 수행을 방해하는 마군)가 와서 경문(經文)을 가렸으므로 종이만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습은 이것이 마라의 소행인 줄 알고는, 서원하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하자 마라가 사라지고 글자가 나타났다. 이어 <방광경(放光經)>을 익히고 암송했다. 다시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째서 이러한 것을 읽는 것인가?”

    구마라습이 대답했다.

    “너는 바로 마라이다. 속히 떠나라. 나의 마음은 대지와 같아 굴러가게 할 수 없다.”

    구자국의 신사(新寺)에 머무른 2년 동안 널리 대승의 경론(經論)들을 외우며, 그 비밀스럽고 심오한 뜻을 꿰뚫었다. 구자국 왕은 구마라습을 위해 금사자(金獅子)의 법좌(法座)를 만들었다. 중국의 비단으로 자리를 깔아, 구마라습으로 하여금 법좌에 올라 설법하도록 했다.

    구마라습이 말했다.

    “저의 스승님도 대승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 스승님께 교화를 하고자 합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 소승경을 가르쳐준 스승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계빈국에서 구자국에 이르렀다.

    구자국 왕이 말했다.

    “대사께서는 어찌 이리도 먼 길을 방문하셨습니까?”

    반두달다가 대답했다.

    “첫째는 제자 구마라습의 깨달음이 범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둘째는 대왕께서 불도(佛道)를 널리 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신령스런 나라로 달려온 것입니다.”

    구마라습은 스승의 방문으로 인해 본디부터 품고 있던 회포를 풀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구마라습은 반두달다에게 <덕녀문경(德女問經)>을 설법해 모든 현상이 대부분 인연(因緣)ㆍ공(空)ㆍ가(假)임을 밝혔다. 예전에 스승과 함께 모두 믿지 못하던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강설한 것이다.

    스승은 구마라습에게 말했다.

    “너는 대승에 대해 무슨 특별한 현상을 봤기에 그렇게도 숭상하려고 하는가?”

    구마라습이 대답했다.

    “대승은 심오하고도 맑아, 모든 존재하는 현상이 공(空)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소승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서 구분해, 여러 가지 빠뜨려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네가 말한 '모든 것은 다 공하다[일체개공(一切皆空)]'는 것은 심히 두려워할 만하구나. 어떻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이냐. 꼭 그 옛날 미치광이와 같구나.

    그 미치광이가 실을 잣는 이에게, 실을 잣되 최대한으로 가늘면서도 보기 좋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실 잣는 이가 정성을 기울여 먼지처럼 가늘게 실을 자았다. 미치광이는 그것도 오히려 굵다고 원망했다.

    실 잣는 이는 크게 노해 허공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가는 실입니다.'라고 하니, 미치광이는 '그렇다면 왜 보이지 않는가?'라고 했다.

    실 잣는 이는 '이 실은 너무 가늘어 우리들 중 솜씨 좋은 장인(匠人)조차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미치광이는 크게 기뻐했다. 보이지 않는 그 실로 베를 짜 달라고 베 짜는 이에게 부탁했다. 베 짜는 이도 역시 실 잣는 이를 그대로 흉내 내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상찬을 받았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너의 현상이 공하다는 것도 역시 이것과 같구나.“

    그러나 구마라습은 계속해서 비슷한 것끼리 연관 지어 방편으로 진술했다. 그렇게 서로 문답을 주고받은 지 한 달 남짓 지나자, 스승 반두달다도 마침내 믿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스승은 감탄해 말했다.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리어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준다'고 하는 것을 바로 여기에서 증험하는구나.”

    이에 반두달다는 구마라습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말했다.

    “화상(和上)은 바로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이에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구마라습의 신통함과 빼어남에 엎드려 복종했다. 매년 강설(講說)할 때에는 왕들이 법좌 옆에 꿇어 엎드렸다. 구마라습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오르게 하니, 그를 소중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구마라습의 도는 서역에 퍼지고, 그의 명성은 동쪽 황하에까지 미쳤다.

  

    그 무렵 중국 관중(關中)에는 5호16국시대로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기도 한 부견(符堅)이 전진(前秦:351~394)이라는 나라를 세워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377년 태사(太史)가 부견에게 아뢰었다.

    “어떤 별이 외국의 분야(分野)에 나타났습니다. 덕이 높은 슬기로운 사람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보좌할 것입니다.”

     부견이 말했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습이 있고, 양양(襄陽)에는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사신을 파견해 그들을 찾아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382년 부견은 장군 여광(呂光)으로 하여금 군사 7만 명을 이끌어서 서쪽으로 가서 구자국(龜玆國)과 언기국(焉耆國)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출발에 임해 부견은 여광을 전별하면서 말했다.

    “대저 제왕(帝王)은 천명(天命)에 응해 다스리고 창생(蒼生)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으로서 근본을 삼는다. 어찌 그 땅을 탐해 정벌하는 것이겠는가. 짐은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습이라는 이가 있어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陰陽)을 익숙히 잘 알아 후학들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하건대 어질고 밝은 현자를 구하는 것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만약 구자국을 정복하거든 곧바로 역말을 급히 달려 구마라습을 후송하라.”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구마라습은 구자국 왕 백순(白純)에게 진언했다.

    “구자국의 국운은 이미 쇠했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해 뜨는 곳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순은 구마라습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 마침내 여광이 구자국을 격파해 백순을 죽이고, 백순의 동생 백진(白震)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구마라습을 사로잡은 뒤, 아직 그의 지혜와 국량을 측량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를 희롱해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 삼도록 했다.

    구마라습은 버티며 수락하지 않았으나, 사양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혔다.

    여광이 말했다.

    “도사의 지조라고 해봤자 당신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어찌 그리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인가?”

    구마라습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에 가둬 버렸다. 구마라습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이미 지극하므로 마침내 그 절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여광은 또 구마라습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뜨리기도 했다. 구마라습은 항상 인욕(忍辱)의 마음을 품어 일찍이 안색이 달라지는 일조차 없었다. 이러하니 여광은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졸들이 이미 휴식하자, 구마라습이 진언했다.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났다. 수심이 몇 길이나 되고,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여광은 그제야 그를 남다르게 여겼다.

    구마라습은 여광에게 진언했다.

    “이 곳은 흉망(凶亡)한 땅이므로 모름지기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運數)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마땅히 속히 돌아가야만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이번에는 구마라습의 진언을 따랐다.

    양주(凉州)에 이르러 부견왕이 부장 요장(姚萇)에게 시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요장은 후진(後秦)을 세워 스스로 황제라 칭한다는 것이다.

    전진(前秦)이 패망했으므로 여광(呂光)은 양주 고장(姑臧)이란 곳에 머무르면서 독립해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여광은 스스로 황제라 하고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했다.

    385년 후진을 세운 요장은 여광에게 구마라습을 후진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구마라습은 여광에게 붙들려 그대로 양주에서 12년간을 머물렀다. 비록 고생을 했지마는 다행하게도 이때 한자(漢字)와 중국어에 통달하게 됐다. 여광(呂光) 이후, 여소(呂紹) - 여찬(呂纂)을 지나 여융(呂隆)에 이르러 후진(後秦) 황제 요흥(姚興-요장의 아들)에게 항복하게 되자, 구마라습은 요흥의 영접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갔다. 그때가 서기 401년이었다.

    요흥은 구마라습을 국사로 예우하고 특별히 총애했다. 마주 대해 이야기하노라면 오래 걸려 하루해가 지나갔다. 미묘한 것을 연구해 극진한 데까지 나아가니, 한 해를 다 보내도록 싫증나는 줄 몰랐다.

    불법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비롯됐다. 그로부터 위(魏)와 진(晋) 시대를 경과하면서 경론(經論)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 등이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文字)에 막혀서, 뜻을 도가(道家)의 경전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흥(姚興)은 어려서부터 불ㆍ법ㆍ승 삼보(三寶)를 공경해, 경론을 결집하리라 날카롭게 뜻을 세우고 있었다.

    구마라습이 장안(長安)에 이른 뒤에 요흥은 그에게 청했다. 그리하여 여러 경(經)ㆍ논(論)들을 번역해 냈다. 구마라습은 이미 주요한 경ㆍ론들을 거의 다 암송하고, 경문의 뜻에 대해서도 연구해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욱이 중국말에도 빼어나 말소리도 유창했다.

    이전에 번역한 경전들을 살펴보니, 경문의 뜻이 지나치게 잘못된 곳이 많았다. 이전에 먼저 번역한 경전들이 바른 의미를 잃은 이유는 범본(梵本)과 대조해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흥(姚興)은 사문 승예(僧叡)ㆍ승조(僧肇)ㆍ승천(僧遷)ㆍ도생(道生), 도융(道融)ㆍ도류(道流) 등 8백여 명을 시켜, 구마라습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고,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케 했다.

    구마라습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姚興)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했다.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으니, 뜻이 모두 원만하게 소통했다. 대중들이 모두 마음으로 흡족해 기뻐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흥(姚興)은 불도(佛道)가 깊고 오묘하며, 그 착함을 실천해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이자,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을 세워 구마라습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경전과 논장을 번역하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십주경(十住經)>, <법화경(法華經)>, <유마힐경(維摩詰經)>, <사익경(思益經)>, <수능엄경(首楞嚴經)>, <지세경(持世經)>, <불장경(佛藏經)>, <보살장경(菩薩藏經)>, <유교경(遺敎經)>, <보리경(菩提經)>,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보살가색욕경(菩薩呵色欲經)>, <자재왕경(自在王經)>, <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신현겁경(新賢劫經)>, <선경(禪經)>, <선법요(禪法要)>, <선법요해(禪法要解)>,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십송률(十訟律)>, <십송비구계본(十訟比丘戒本)>, <보살계본(菩薩戒本)>, <대지도론(大智度論)>, <성실론(成實論)>, <십주론(十住論)>, <중론(中論)>,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 경전과 논서 70여부 384권을 역출함으로써 구마라습은 중국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위대한 역경승이었다.

    그의 번역은 간결하고 유려한 달의적(達意的) 번역이어서 오늘날까지 많이 읽히고 있으며, 특히 대승 논부는 이때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졌고, 그는 격의불교(格義佛敎)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법화경>이나 <아미타경>의 역문 등은 오늘에도 칭송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해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됐다.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됐다.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구마라습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구마라습이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구마라습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의 현장(玄奘)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신역(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구마라습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됐다. 구마라습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譯)이라 불린다.

    이러한 구마라습의 번역 사업은 훗날 삼론종, 천태종의 종파불교가 형성될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고, 대승선법과 남종선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게 됐으며, 교판불교의 등장과 불교의 토착화를 완성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구마라습은 당의 현장(玄奘)과 함께 2대 역성(譯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譯經家)로 꼽기도 한다. 구마라습 문하에는 3천여 명이 있었으며, 많은 고승이 배출됐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경ㆍ론은 어느 것이나 모두 신묘한 근원을 환하게 드러내고, 그윽한 이치를 발휘했다. 당시 사방에서 교리를 공부하려는 이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구마라습의 성대한 업적의 위대성은 오늘날까지도 모두 다 우러러보는 바이다. 용광사(龍光寺)의 석도생(釋道生, 355~434)은 지혜로운 앎이 미묘한 경지에 들어가고, 현묘한 의미를 문자 밖까지 이끌어 내놓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언어가 본뜻을 어그러뜨릴까 염려해, 관중(關中)에 들어가 구마라습에게 해결해 주기를 청했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 334~416)은 많은 경전들을 배워 꿰뚫었다. 석가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펼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불교계의 동량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성인께서 가신 지가 아득히 멀고 오래돼, 의문스러운 내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구마라습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이 <혜원전(慧遠傳)>에 보인다.

    사문 승예(僧叡, 355~439)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다. 항상 구마라습을 따라다니며 옮겨 베끼기를 담당했다. 구마라습은 매양 승예(僧叡)를 위해 서방의 말투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漢字)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해 말했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습은 예전에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마음 산(山)에서 밝은 덕을 길러(心山育明德)

그 향내 일만 유연(由延)까지 퍼지고(流薰萬由延)

오동나무에 외로이 깃든 슬픈 난새(哀鸞孤桐上)

청아한 울음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네(淸音徹九天)」

    

    이와 같은 게송 10게를 지었으니, 게송에서의 글의 비유가 모두 이러했다.

    구마라습은 평소 대승(大乘)을 좋아해, 대승(大乘)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한탄했다.

    “내가 붓을 들어 대승아비담(大乘阿毘曇)을 짓는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날개가 부러졌으니 무엇을 더 논하겠는가.”

    이와 같이 한탄하면서 쓸쓸히 그만두었다.

    그의 번역문은 깎아내어 고칠 것이 없었다. 문장의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簡明)해, 그윽하고 깊숙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구마라습의 사람됨은 맑은 정신이 밝고 투철(透徹)하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임기응변해 깨달아 아는 것은 무리 가운데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했다.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했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며 종일토록 게으름이 없었다.

    후진의 임금 요흥이 항상 구마라습에게 말했다.

    “대사의 총명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어 법의 씨앗이 될 후사가 없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요흥의 간곡한 뜻에 따라 중국여성과 혼인, 환속한 이후 그는 경전 한역에 전념하면서, 이후로부터는 승방(僧坊)에 머물지 않고 따로 관사를 짓고 살았다. 모든 것을 풍부함이 넘칠 정도로 공급받았다. 매양 강설(講說)할 때에는 먼저 듣는 이들에게 말했다.

    “비유하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을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예전에 구마라습이 구자국(龜玆國)에 있을 때, 비마라차(卑滅叉) 율사(律師)에게 계율을 배웠다. 뒤에 비마라차가 장안에 들어왔다. 구마라습은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쁘게 맞이해 스승을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했다.

    구마라습은 어느 날, 온몸이 상쾌하지 못함을 느꼈다. 이에 곧 입으로 세 번 신주(神呪)를 외웠다. 그러나 주문의 효력이 미치지 않아, 한층 더 위독해졌음을 알았다. 이에 구마라습은 병을 참으면서 대중 승려들과 이별을 고하며 말했다.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했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했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했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해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409년 8월 20일 구마라습은 장안(長安)에서 돌아가셨다. 곧바로 소요원(遡遙園)에서 외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했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타 없어졌건만 오직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焚身之後 舌不燋爛].

    후에 어떤 외국 사문이 와서 말했다.

    “구마라습이 암송한 것 중 열에 하나도 번역해 내지 못했다.”

    중국불교사 내지 중국사상사와 문화사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구마라습이라 말할 수 있다. 그가 중국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장안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도 매우 극적이지만 장안에 들어와 이룩한 번역 사업의 성과는 이후의 중국 사상과 문화에 일대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운명이라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우리들에게 주는 것이다.


'□ 佛철학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마라습, 구마라기바, 쿠마라지바  (0) 2024.08.13
항복기심  (0) 2023.10.18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0) 2023.07.2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